정해연 <홍학의 자리>를 읽고
비틀어진 인정 욕구로 인한 파괴의 서사, 누구에게나 도사리고 있는 악의에 대한 통찰을 담은 스릴러
정해연 작가의 최신작인 <홍학의 자리>는 독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으며, 도서관 대출 순번을 기다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정해연 작가는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의 전개로 독자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간 <용의자들>, <미친X들>, <악의>, <못 먹는 남자>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스릴러 장르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져온 정해연 작가는 이번 작품으로 그 위치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호수가 다현의 몸을 삼켰다.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머리칼과 잘록한 허리, 밤을 새워 지분대던 가슴과 길쭉한 다리, 사랑을 나눌 때면 천장을 향해 만족스러운 듯 뻗던 희고 긴 손가락이 기억과 함께 호수 바닥으로 사라졌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를 재촉하듯 질러대던 교성은 이미 숨을 잃은 다현이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홍학의 자리>는 시작부터 강렬합니다. 사건의 발단을 곧바로 보여주며, 등장인물 간의 특수한 관계성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작품의 주인공 준호는 아내 영주와 별거 중이며, 지방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2학년 학생인 다현과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준호는 다현에게 전용 휴대폰을 제공하는 등 치밀하게 관계를 은폐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도덕적 결여와 자기중심적 성향이 드러납니다. 그는 다현을 사랑한다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실상 다현은 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다현은 어린 나이에 부모 없이 외롭게 성장한 인물로, 준호에게서 유일한 안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준호는 다현의 죽음을 발견했을 때도 범인을 찾기보다는 일단 다현의 몸 속에 남은 자신의 실체가 밝혀질까봐 두려워 다현의 시신을 호수에 유기하며 자신도 몰랐던 악의를 드러냅니다. 다현과의 관계 뿐 아니라 아내 영주와의 관계를 지극히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고 자신의 자녀에 대한 책임감도 전혀 없는 모습 등 이 사건을 계기로 준호는 단순히 이기적이라는 수준을 넘어선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보여줍니다. 독자는 준호의 관점에서 사건을 따라가며 때로는 그의 논리에 설득될 뻔하다가도, 이내 그의 악의를 직면하며 섬뜩함을 느끼게 됩니다.
작품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에 주목합니다. 정해연 작가는 일상에서 평범하게 묻혀 있던 악의가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폭발적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줍니다. 작품 속 다현의 죽음은 단순한 사건 이상의 복잡한 원인과 결과를 내포합니다. 다현의 외로움, 다현의 어머니의 죄로 인해 다현에게 이어진 주변 어른들의 압박, 준호의 위선과 욕망이 얽히고 설킨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악의들이 연결된 선택과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보여줍니다.
-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비틀어질 때 -
나를 이해해 주는 건 선생님뿐이에요."
"선생님을 이해하는 건 나뿐이에요."
"날 이해해 주는 건 당신뿐이야."그렇게 말했을 때 영주의 감격하는 표정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타인의 평가에 왜들 그렇게 목숨을 거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 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 욕망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이끌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다현은 이 경계를 넘으며 자기파괴로 이어졌고, 준호에게는 그런 욕망이 거의 없습니다. 준호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에만 집중하고 타인의 그런 인정 욕구를 이용해 다현 뿐 아니라 영주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하며 그녀를 이용합니다.
차에 불이라도 질렀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준후는 화들짝 놀랐다. 황권중의 차를 발견했을 때, 차 안에 가득한 유독가스 냄새를 맡고 도망쳤을 때, 황권중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 무의식 중에 불을 질러도 된다고 생각했다. 다현 역시 자신이 물에 던지기 직전까지 미약한 숨이 남아 있었다. 적어도 그때는 죄책감이 있었는데, 어느새 사람의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건가.
- 악의는 누구에게나 -
준호는 사건에 개입된 이후부터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악의에 놀라게 됩니다. 준호 뿐 아니라 준호의 동료 교사인 조미란, 학교 경비원 황권중, 다현의 어머니의 죄로 인해 다현에게 원한을 품은 은성 또한 평소에는 평범한 인물로 보이지만, 사건이 전개되면서 각자의 악의가 모습을 드러납니다. 정해연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악의가 특정 인물만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는 내면에 악의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드러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다현은 도대체 누구 때문에 죽은 것일까요? 다현의 죽음 뒤에 감춰진 진실과 다현이가 준호의 아내인 영주에게까지 찾아가서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홍학 이야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직접 읽어보며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홍학의 자리>는 스릴러로서의 재미와 긴장감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본성과 악의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작품을 읽는 동안 독자는 준호와 다현,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가진 악의를 마주하며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다 악의를 품고 있으나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잘 숨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준호나 그 밖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한 번 악의가 드러나고 나면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 작품은 믿기 어려운 심연의 어두운 모습을 직면하는 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주변의 타인들 또한 나와의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와 달리 그 심연에는 어떤 악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또한 두렵습니다. 한 번 책을 집으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므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