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만의 역주행 베스트셀러 추천 도서 : 양귀자 '모순' 서평, 삶의 모든 선택은 모순이다.

 26년만의 역주행 베스트셀러 : 양귀자 <모순> 서평

삶의 모든 선택은 모순이다. 

 

 양귀자 <모순>은 지난 2월에 갑자기 26년 만에 폭발적으로 역주행을 하며 베스트셀러 상위권 차트에 진입했습니다. <모순>은 주인공을 둘러싼 양극의 대상들의 극명한 대비점 사이에서 그들을 관망하고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의 모순을 통해 인생의 모든 선택은 모순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그런 모순을 겪고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삶이라고 말합니다. 작가 특유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도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와 현실적 인물들을 통해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마냥 만만하지는 않고 여운을 남기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순 | 양귀자 - 교보문고 



p15. 뒤에 더 이상 이을 말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아버지 못지않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진모 때문에 바람 잘 날 없는 어머니를 보며 진진은 직장 다니며 제 앞가림이나 잘하자고, 그런 아버지 밑에 또 그런 자식이란 소리는 진모 하나만으로 족하고 자기만이라도 그 말은 안 듣고 살려고 애쓰며 삽니다. 속이 시끄러운 것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냥 매일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원래 이렇게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인 게 인생인 게 맞는지 깊은 질문에 빠집니다.



p21.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p188.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나 역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이러이러한 일로 지금 죄수복을 입고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해줄 수 있었다면 김장우의 아픔은 훨씬 가벼워졌을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성공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실패담보다는 자신보다 백 배 이상 성공한 사람의 성공담을 귀담아듣는 게 이득이지만 위로를 받고 싶다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누군가의 실패담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유전자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유대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게 더 큽니다. 유대감과 공감이 포인트이기 때문에 화목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불우하고 가난하게 살아온 사람을 절대 위로할 수 없고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하기 때문에 김장우가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힘들어할 때 자기의 현재 불행인 동생 진모 이야기를 꺼내어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불행한 가정 속에 있는 여자임을 보여주기 싫어서 위로해 줄 수 없었습니다.



p90.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아버지에게 있었다. 아버지는 상스러운 욕설을 하더라도 입술을 깨물며, 이마에 푸른 힘줄을 돋우면서, 온 힘을 다해 자신도 지금 죽을 듯이 괴롭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려주었다. 오죽했으면 나와 진모는 물론이고 맞고 있던 어머니까지도 저토록 괴로운 일을 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해 순간순간 동정심을 품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
p94. "해 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쪽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은 어머니를 패고 온 집안 살림을 다 때려 부수고 어머니가 힘들게 번 돈을 들고나가버렸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아버지를 왜 이해하려고 하는 걸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이지만 누군가는 가봐야 비극이고 절망이라는 것을, 아주 잘못된 길이고 결과가 어떨지 자명함에도 멈출 수 없는 모순적인 삶이 운명일 수 있습니다. 

 

 

p218.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하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왜곡시킨다.
p277.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사랑한다면 솔직해야 한다.'라는 문장은 반은 맞고 반을 틀렸습니다. 사랑은 어떻게든 더 잘나 보이고 싶어하는 노력으로 시작됩니다. 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난 것은 과장하고 못난 것은 은폐하거나 숨기기도 합니다. 솔직함은 그 뒤의 더 발전된 관계를 위해 따라갑니다. 

 안진진은 몽상가 김장우를 사랑하지만 실용주의자 나영석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저 계획대로 알차게 보내는 것을 좋아하며 자기와 달리 밝게 살아가는 나영석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안진진을 보여줬습니다. 그 편안함이 결혼에는 더 적합한 키워드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랑해야 결혼할 수 있다'도 맞는 말입니다. 안진진의 김장우에 대한 사랑은 너무 특별한 사랑, 넘쳐버리는 사랑이어서 오히려 솔직할 수 없었고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반면 나영석에 대한 사랑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사랑이라서 결혼까지도 가능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랑일 뿐 사랑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p138. 어머니에 비하면 이모는, 끊임없이 세심하게 손질을 해주며 가꾸고 있는 이모의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은 얼마나 보기가 좋은가. 푸른색 소매 없는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이모의 동그란 어깨는 얼마나 아기자기한가.(...) 오직 어머니만이, 뽀글뽀글 볶은 머리를 하고 심술궂게 앉아있는 어머니만이 이 집에서 단 하나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었다.
p283.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 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이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고는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p296.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진진의 어머니는 낮에는 없다시피 한 남편 대신 가장으로서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밤에는 진모가 사고 친 걸 수습하려고 '형사법'을 읽고 진진의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고 '정신분열증에 대한 이해와 치료'의 책을 읽느라 늘 하루가 24시간인 것이 너무 짧습니다. 장사가 잘 안 될 때는 거침없이 종목을 바꾸고 일본어를 배우는 진진의 어머니는 인생의 모든 불행이 삶의 에너지인양 살아갑니다. 그녀에게 고난과 역경은 아궁이에 계속 넣어지는 장작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동생이자 진진의 이모가 고상을 떨고 앉아있는 걸 보면서 늘 비아냥거립니다. 마치 '너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있긴 하느냐'라고 반문하는 것 같습니다. 진진의 어머니는 이게 끝나면 저게 오는 식으로 여전히 불행의 연속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나름 전략적으로 해내고 있는 와중에 종종 고상한 동생이 떡 하니 서 있으면  자기 인생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장애물일 뿐이라 어쩔 수 없이 밟아 죽이고 지나가야만 다음 레벨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무식해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방식입니다.

 

 반면 진진의 이모는 그 어떤 불행도 없이 거의 완전무결합니다. 돈 잘 벌고 언제나 할 도리를 어기는 법이 없는 남편과 속 한 번 섞이지 않고 탄탄대로를 걸어 멋지게 장성한 두 자식. 더 바랄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모는 나가서 진이 빠지게 돈 벌고 자식 때문에 속이 뒤집어지고 남편 때문에 멍들고 다치다 툭하면 우당탕탕 거리며 자신에게 아이들을 데려다 놓는 언니의 삶이 늘 부러웠습니다. 진진의 어머니가 들었다면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냐고 역정을 내겠지만 이모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생일이나 가족여행마다 늘 복사해서 갖다 붙인 듯한 한 치의 오차 없이 똑같은 데이트에 질려서 차라리 혼자 겨울밤에 걸어 다니고 조카인 진진과 놀러 다닌 게 가장 즐거웠던 하루라고 회상할 만큼 지리멸렬하게 살았습니다. 뭔가를 도전하려고 하면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나서냐는 식으로 정중하게 자신을 주저 앉히는 남편에게 자신이 원하는 걸 말 못 하고 산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진진이네 가족 모두에게는 원흉인 진진이 아버지에 대해서 유일하게 관대했던 이모는 왜 그에게 관대할 수 있었을까요? 단지 자신이 형부랑 사는 건 아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삶이 지루해죽겠는 이모는 지루할 틈 없이 머릿속과 마음속이 분주하다 못해 자주 터져버리고 마는 형부마저 부러웠던 건 아닐까요? 지루함과 권태로움이 위태로움으로까지 번져간 이모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결말은 직접 읽어보길 바랍니다.

 

 

 연속된 불행에도 오히려 늘 힘이 넘치던 진진의 어머니, 복에 겨운 생활에도 불행했던 진진의 이모, 진진의 가족에게 가장 잔인한 존재였지만 가장 약한 존재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만 모순적인 존재인 게 아닙니다. 안진진 역시 결혼이라는 중대사에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남자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 선택이 생뚱맞지 않고 이해됩니다. 게다가 이 책이 쭉 이야기하는 대로 어차피 어떤 선택을 해도 모순이라 별 상관도 없다는 게 핵심입니다. 애초에 진진은 자기 인생의 볼륨감이 너무 없다는 것에 통탄하며 대단한 여정을 시작할 것처럼 굴었지만 뻔한 결혼을 선택한 것도 모순입니다.

 

 진진의 결혼생활이 행복할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 때로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 느끼고 때로는 맞다고 느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삶은 불행한 만큼 행복하고 행복한 만큼 불행합니다. 안진진만큼은 이야기 속의 모든 극단적인 모순적인 존재들과는 다르게 불행과 행복의 균형이 적절한 윤택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작가는 주로 연재소설을 묶어내던 것에서 벗어난 단편소설 <모순>에 대한 애정을 담아 독자들에게 천천히 읽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죄송하게도 단숨에 읽어버릴 만큼 무난하고 재밌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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